후설 전사(前史)
(4.1) 칸트 vs. 후설
[현상학사전, b, 항목] 구성 [(독)konstitution]
I. 어원상으로는 '놓다, 세우다'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함. 철학사적으로는 결합, 규정, 원리짓기, 근거짓기, 구조, 성질 등의 의미를 가졌다.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에서 객관적 경험을 근거짓는 가능성 문제와 결부되어 구성 문제에서의 커다란 전기가 마련되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구성적'(konstitutive)이라는 형용사형으로 사용되며, '규제적'(regulativ)과 맞짝개념을 이루어 사용된다. 객관적 경험을 근거짓고 대상의 인식을 제약하고 규정하는 원리가 구성적이며, 그에 반해 사유를 규제하여 인식에로 이끌 뿐으로, 절대적 한계에 멈추어 서지 않고 이미 인식된 경험에 체계의 통일을 부여하는 원리로서의 규제적 원리와 구별된다. 또한 수학적 인식에서와 같은, 그 밑에 포함되는 모든 가능적 직관에 대한 보편적 타당성을 표현하는 비감성적인 순수 직관에서의 특정한 대상의 '구성'(Konstruktion)과도 구별된다.
II. 후설 현상학에서 구성 개념은 중심 문제. 특히 1910년대 이후. 그는 이 말을 신칸트학파, 특히 나토르프로부터 이어받았다고 생각되지만 술어적으로는 '구축'(Konstruktion)과 구별하는데, 이것은 형이상학적 전통에 기초하는, 즉 사태 그 자체에 의거하지 않는 외적인 이론적 구축을 가리키는바, 칸트적 의미에서의 구성은 후설에서는 구축이 된다. 현상학적 의미에서의 구성은 그의 초월론적 철학 전체와 연관되는 중심문제인데, 그때문에 경우에 따라 다의적으로 사용되어 말뜻 그대로 "많은 것의 결합"에서 시작하여 "사물들의 질서짓기", "사물들의 완성, 산출",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표상들의 질서짓기", "우리에게 표상적으로 주어진 사물들의 대상의미의 산출"을 의미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지향성 개념과 연관하여 다양한 인식작용을 관통하여 지속하는 대상적 동일성의 구성, 형성을 의미한다.
후설 자신에 입각하여 보면, 크게 두 가지 의의를 구별할 수 있다. (1) 그가 어떤 서간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어떤 작용에 의해서 대상이 구성된다는 것은 "대상을 표상하는" 작용의 성질을 의미하는바, 이 말의 본래적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성이란 뭔가의 능동성이 불가결하다 하더라도 "이미 현존하고 있는 것이 주관에 의해 재확립되는 것", 한마디로 말하면 "재확립"이다. 의식에서 자기를 '고지하고 고하는' 대상의 구성은 후설에게서 또한 '의미부여' 내지 '의미형성'과 거의 동일한 의미에서 말해진다.
(2) 초월론적 현상학이 확립되고 그것이 또한 초월론적 관념론이라는 것이 강조된 1920년대 이래로, 구성은 능동적인 의미도 갖게 되어 예를 들면 능동적 발생의 원리의 경우[CM111]와 같이 '산출'이라는 표현과도 결부되어 사용된다. 그러나 이 경우의 산출은 실재하는 영역과 관계하는 실증주의적인 의미에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심적 과정에서 주어져 있고" "심적 실재성에서가 아니라 이러한 심적 과정으로 향해진 내실적 주체설정"에서 논의되는, 즉 존재정립을 괄호에 넣은 이념적 의미의 지향적인 산출을 말한다. 따라서 이념적 대상성이 근원적으로 산출된다는 것이란 그것 자체가 명증적으로 근원적인 능동성의 지향성 속에서 의식되는 것이라고 주장된다. 어쨌든 후설에서 구성 개념은 반드시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의성과 "의식되지 않는 그늘"이 따라붙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후설의 경우 초월론적 구성의 의미는 의미형성과 창조 사이를 동요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III. 후설의 구성분석은 다양한 의식작용과 이 작용에서 고지되는 지향적 대상통일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이다. 현상학은 사태 그 자체가 자기를 보이는 대로 볼 수 있게 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의 세계의 개시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소박하게 또는 학적으로 실재한다고 간주하는 다양한 객관과 인간과 세계는 현상학적으로는 결코 그대로 절대적 소여성인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 사물 지각은 원리적으로 음영을 통해 일면적으로 주어지고, 언제나 "비본래적인, 규정되어 있지 않은 애매한 지평을 수반하며", 따라서 세계의 존재는 "가정적인 현실"인 데 비해, 체험 지각의 내재적 소여성은 반성하는 의식과 반성되는 의식이 동일한 의식의 흐름에 속하기 때문에 절대적이며, 그 존재는 "필연적인 정립"이다. 다른 한편, 의식의 내재적 존재는 그 존재를 위해 원리적으로 어떠한 존재도 필요로 하지 않기에 절대적이지만, 그러나 초월적인 사물의 세계는 의식에 의거한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자기를 우리의 인식에 주는 것은 의식의 삶의 영역에 놓여 있다. 연구를 이러한 절대적으로 주어지는 영역으로 이끌기 위한 방법이 초월론적 환원이며, 그에 의해 의식 체험이라는 경험의 내재적 영역이 파헤쳐지지만, 그 경우 환원에 의해 나타나는 내재적 영역에는 의식작용과 상관적으로 인식객관이 현상으로서 남겨진다. 환원 이전에는 의식에게 전적으로 초월적이라고 생각된 이러한 객관은 내재적인 의식 속에 일종의 초월로서 존재하는 것인바, 이러한 의식의 내재에서의 "현출과 현출하는 것"의, 즉 "현출하는 것의 소여성과 대상의 소여성"의 지향적 관계 문제, 좀더 말하자면 "일정한 무한히 다양한 현출"과 "통일성으로서의 일정한 현출하는 것" 사이의 "상관관계의 법칙적 작용"이라는 문제가 현상학의 중심문제로 된다. 실재로 존재하는 대상은 의식의 연관에서 사념되는 동시에 사념되어야만 하는 통일성이며, 어떠한 경험도 자기를 넘어서서 일치하여 계속되는 무한한 가능적 경험을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상과 나아가 세계라는 것은 "일치하여 결합되어야만 하는 경험들과 관계하는 무한의 이념"이다. 대상과 세계의 현출에서의 모든 종합이 일정한 질서를 갖고서 함께 기능하고, 일체의 가능적이고 현실적인 대상성 및 그것과 상관적인 의식이 성립하는 것은 초월론적 주관성의 구성적 종합에 의한다.
후설은 자기의 현상학에 초월론적 관념론이라는 성격을 부여하고 있지만, 이와 같은 특징부여에 의해 그는 전통적인 관념론과 실재론을 넘어서서 제3의 철학의 길을 모색했다. 이들 양자의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 즉 의식과 초월적 실재성의 관계가 어떠한 것이며 이 관계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해명하는 것이 그의 작업이었다. 그것은 초월론적 현상학의 문제제기 틀 내에서 각각의 의식 지향성으로부터만 그 정당성과 타당성을 얻을 수 있어 의식의 생이 돌파되는 장소는 후설에게 있어 전혀 생각될 수 없는 것인바 "의식의 주관성 그 자체 속에서 나타나는 지향적인 통일이라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이 가능한 초월"과 만나는 것은 아니다. 생각되는 모든 의미와 존재는 의미와 존재를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초월론적 주관성의 활동에 의해 현실적 및 잠재적으로 함의된 형성체이다. 더 나아가 초월론적 주관성의 함의된 지향성은 개별주관적인 의미 형성에 의할 뿐 아니라 상호주관적 내지 공동체적으로 생성된 것이기도 하다. 풍부한 구체성에서 존재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재도 그에게 있어 초월론적 주관성이 하나의 모나드로서 자기 구성한 것에 다름 아니다. 초월론적 관념론으로서의 현상학은 함의된 지향성에 대한 수미일관한 자기 해석의 작업이며, "구성하는 지향성 그 자체의 체계적 해명"이다. 현상학이 과연 이와 같은 학으로서 성립하는지는 구성 분석을 관철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관계되는 것인바, 구성적 현상학이 그의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의 중심개념이 되었던 것이다. (후략)
[현상학사전, b, 항목] 주관/객관
칸트에서 시작되는 인식론 상의 맞짝 개념. '주관'이라는 말은 아래에 던져진 것(라틴어번역 subjectum)에서 온다. 근대 이전에 subjectum은 이러한 어원 그대로 다양한 성질의 근저에 놓인 그것들을 떠받치는 <기체>라는 존재론적인 의미를(그리고 명제 중에서 다양한 성질에 의해 술어가 부가되는 '주어'라는 논리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subjectum은 오늘날의 의미와는 정반대로 정신이나 의식에서 독립하여 존재하는 실체, 의식 바깥에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바, 오늘날의 <객관적인 것>에 오히려 가깝다. 이에 반해 '객관'의 어원인 라틴어 objectum의 원래 뜻은 '~로 향하여 던져져 있는 것'이어서 외적 사물이 마음에 대해 던져 주어져 표상되고 있는 상태, 요컨대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주관적인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양자의 의미가 결정적으로 역전되는 것은 칸트에서이다.
근대 초기에는 아직 두 개념의 원의에 가까운 용법이 인정된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는 realitas objectiva를 '관념으로서 표상되는 한에서의 사태 내용'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한다. 나아가 홉스와 라이프니츠는 영혼을 subjectum이라 부르고 있지만, 이것은 감각을 짊어지는 기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그러나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더불어 용어 의미의 역전이 결정적이게 된다. 이미 데카르트는 앎의 절대적으로 확실한 기초를 사유하는 자아 속에서 발견하고 있었다. 신체로부터 분리된 순수한 정신으로서의 자아가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는 것만이 참된 의미에서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자아는 그의 이성적인 인식에 의해 말하자면 세계를 떠받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정신과 의식이 모든 존재자의 근저에 놓여 있는 <기체>라고 말하게 된다. 이리하여 인식을 행하는 한에서의 자아와 의식이 subject의 의미를 독점한다. 데카르트가 준비한 이러한 인식론적 체제를 자각적으로 완성하여 Subjekt=주관을 술어적으로 정착시킨 것이 칸트이다. 칸트의 경우 세계를 구성하여 지탱하는 것은 결코 개인적인 경험적 자아가 아니라 초월론적인 '주관'이다. 이러한 subjectum의 의미변화와 동시에 objectum 쪽도 이러한 '초월론적 주관'에 의해 구성되고 그런 한에서 존재를 보증받는 것, 요컨대 이른바 '객관'이라는 의미로 변하게 된다. 칸트에 의하면 주관이 감각소여를 자기의 선험적인 형식에 의해 정리하고 질서지우는 것에 의해 비로소 '객관'이 성립한다. 요컨대 객관은 어디까지나 초월론적 주관에 의해 앞에 세워진 대상인 것이다. 주관에 상관적인 대상으로서의 '객관' 외에 칸트는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불가지적인 사물 자체의 존재도 인정하지만, 독일 관념론의 철학자들은 사물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고 일체의 존재자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절대적 주관에 의해 산출된다고 설파하여 근대 주관주의를 완성한다. 어쨌든 근대에는 주관의 객관에 대한 우위가 움직이기 어렵게 되었다. 후설은 이러한 맞짝 개념으로부터 형이상학적 배경을 제거하고 이것을 의식의 지향작용과 지향대상(의미)으로 바꿔 읽음으로써 자기의 현상학의 방법개념으로서 이용하고 있지만, 이러한 바꿔 읽음에는 주관과 객관의 어느 쪽인가를 모종의 의미에서 실체로 간주하는 지금까지의 이항대립을 극복할 가능성이 감춰져 있다. (항목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