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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성

 

 

(1) 후설에 의하면 엄밀학으로서의 현상학의 사태는 지향성이다. 후설에게 있어서 지향성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명석판명한 출발점이다. 그것은 의식의 본질이다.

 

(2) 지향적인 모든 정신활동은 그 자체 내에 대상인 어떤 것을 포함한다. 지향적 관계는 하나의 사물과 사물의 자연적, 외적인 관계가 아니기에 외적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지향하는 의식의 자기확인에 의해서만 해명될 수 있다.

 

(3) 지향적 의식 : 의식활동의 질료라 부를 수 있는 초월적 대상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주어져야 한다. 대상은 그것에 대한 의식활동인 '노에시스'에 의해 구성된 것이며, 대상은 노에시스에 의해 구성된 의미인 '노에마'이다. 의미가 질료에 전적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하면 경험주의겠지만 후설은 그렇게 주장하는 방식을 피한다.

 

(4) 의식은 언제나 그 무엇에 대한 의식이며, 대상을 지향함으로써 그 대상을 언제나 이미 의식 자체 내에 지닌다는 의식의 기본구조가 지향성이다. 

 

(5) 그래서 문제는 '대상이 의식에 어떻게 주어지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주어져 있는가'이다. 현상학자는 그 미리 주어져 있음의 방식, 주어지는 방식, 나타남의 방식을, 의식에 대한 타당성의 양상을 분석하여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 현상학 사전을 통해 추가한 것]

지향성

 

   브렌타노의 지향성론. 그는 1874년 초판의 『경험적 입장에서의 심리학』 제1권의 124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심적 현상은 중세의 스콜라 학자들이 대상의 지향적(내지는 심적) 내재라고 불렀던 것에 의해서, 그리고 우리가 다소 애매한 표현이긴 하지만 내용에 대한 관계, 객관(여기서는 반드시 실재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으로의 방향, 또는 내재적 대상성이라고 부르고자 생각하는 것에 의해서 특징지어진다. 어떠한 심적 현상도 동일한 방식으로는 아니지만 무언가를 객관으로서 그 자신 속에 포함한다. 표상에서는 무언가가 표상되며, 판단에서는 무언가가 승인 또는 부인되고, 사랑에서는 사랑되며, 증오에서는 증오되고, 욕구에서는 욕구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향적 내재는 심적 현상에 고유한 특성인바, 물적 현상은 이와 같은 특성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적 현상이란 지향적으로 대상을 그 자신 속에 포함하는 현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설명되고 있는 브렌타노의 지향성론은 더 나아가 이러한 해설로써 거의 남김없이 말해지고 있다.

 

   즉, 그에게 있어서는 기술적 심리학의 연구 영역을 물리적 자연과학의 영역으로부터 명확히 구별하기 위한 근거로서 심적 현상과 물적 현상의 차이를 명시하고, 이어서 심적 현상에는 표상과 판단과 정감(즉 애증)의 세 종류가 있으며 나아가 표상이 모든 심적 현상의 기반이라는 것을 말하게 되면 이미 그것으로 충분한바, 후설처럼 그로부터 더 나아가 지향성 개념을 축으로 하여 인식론적 연구에 발을 들여놓지는 않았다. 덧붙이자면 1889년의 그는 여전히 심적 현상의 공통 특성이 "무언가에 대한 지향적 관계라고 불리는 주관적 태도"에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무언가란 예를 들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적으로 대상으로서 주어져 있는 것을 가리킨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1905년 무렵 이후 브렌타노는 이러한 심적 내재설을 스스로 부정하여 실재하는 것만이 표상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며, 그에 따라 <지향적>이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 다음으로 스콜라 철학의 intentio는 도대체 어떠한 뜻을 지니고 있던 것일까? 이 라틴어는 영어의 tension, tendency, attention 등의 어원이기도 한 tendere(<긴장하다, 향하다, 지향하다, 노력하다> 등을 의미하는 동사)로부터의 파생어이기 때문에, 따라서 11세기 무렵까지는 대부분 오로지 <행위의 의도와 목적>을, 즉 실천적인 <의지의 활동>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러나 12세기에 아비센나 등의 아라비아 철학이 라틴어로 번역될 때에 <어의와 관념> 등을 의미하는 아라비아어의 mana가 intentio라고 번역되었기 때문에, 그 이래로 이 말은 <지성의 활동>인 인식작용과 그 형성물에 대해서 사용되게 되며, 그 결과 특히 후기의 스콜라 철학에서는 <지향적 존재>를 <지성의 작용에 의존하는 주관적인 존재>로 보는 해석이 우세하게 되었던 것이다.

 

   II. 후설의 경우. 후설에 의하면 "지향성이라는 말은 의식이란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며 코기토로서 그 자신 속에 코기타툼{=의식내용으로서의 지향적 대상}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는, 의식의 이러한 일반적인 근본 특성을 의미하며", 그리고 "이러한 지향성이라는 명칭에는 휠레의 문제까지도 포함하여 현상학의 모든 문제가 짜 넣어져 있다". 사실 그의 현상학적 고찰은 cogito-cogitatum의, 즉 노에시스-노에마의 상관관계를 분석하여 기술하는 작업을 통해 <대상을 지향하고 인식하는 의식주관의 기능들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지향되는 대상은 의식주관에 대해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자로서 주어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둘러싸고 순차적으로 전개되어 심화되어 간다. 요컨대 이러한 지향성 문제는 후설을 필연적으로 인식론과 존재론과 자아론을 연결하여 통합하는 광범위한 연구의 장으로 이끌고, 나아가 시간론의 고찰도 촉구하는 근본 동인이기 때문에, 그의 저서와 강의록들 모두가 다양한 관점에서 지향성의 구조와 기능들을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것들 중에서 특히 중요한 사항만 선택 약술..

 

   (1) 대상에로 향하는 지향과 지평지향성. 지향의 특성으로서 후설이 최초로 지적한 것도 <대상에로의 방향>이다. 표상, 판단, 감정, 의지, 욕구, 그 밖의 어떠한 성질의 지향작용이든 모두 각각의 방식으로 무언가의 대상으로 향해 있으며, 통상적으로 그 대상은 그때마다의 지향적 체험(=작용) 속에서 <목표로서 겨눠져> 사념되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는 <겨누다, 주목하다, 주의하다> 등이라는 비유가 해당되지 않는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지향>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무언가 소리가 나고,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기미가 있다는 등의 경우가 그렇다. 나아가 이러한 방향 불확정성과는 별도로 특정한 대상으로 향한 현실적인 지향적 체험이라고 하더라도 사실은 언제나 <전적으로 주의되고 있지 않은 배경>에 둘러싸여 있다. 후설은 이것을 <무의식의 지향성>이나 <지평지향성>이라고도 부르며, 나아가서는 <공허지향>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말해지지 않는 숨겨진 지평지향성>도 현실적인 지향의 배후에서 잠재적으로 함께 기능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주의를 ''돌린다''는 말은 새롭게 주의가 향해지는 대상이 이미 이전부터 배경의 대상으로서 의식의 장 속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주목되지 못한 채 지각의 주제적 대상으로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거나 "''현실에서 현시되는 것''의 핵은 반드시 비본래적인 ''그것에 부수하는 소여''와 막연한 무규정성의 지평에 둘러싸여 파악된다"고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표상지향과 판단지향 및 감정지향 등과의 상호관계로 되돌아오면, 이들 사이에는 <기초짓는 지향>과 <기초지어진 지향>의 구별이 놓여 있다. 이미 브렌타노도 "표상되지 않는 것은 판단될 수도 욕구될 수도 없다"고 말했지만, 후설도 표상이 가장 기초적인 작용이며, 기초지어진 지향(예를 들면 감정지향)과 그 대상은 그것을 기초짓는 표상지향과 표상대상을 기반으로 후자와의 복합에 의해 성립한다고 하고 있다.

 

   (2)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구성적 수행으로서의 지향성. 의식은 단지 대상으로 향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외계의 초월적인 실재사물에 눈을 돌릴 뿐만 아니라 <이것은 노송나무다>라든가 <저기에 도로 표지판이 있다> 등이라고 말한다. 즉 눈에 비치는 대상을 인식할 때 우리는 그 사물에 <노송나무>나 <도로 표지판>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이 <무엇인가>를 규정한다. 이와 같은 <의미부여, 의미규정>의 수행이야말로 후설이 말하는 "구성하는 지향성"의 주요한 기능인바, 대상이 지니는 의미는 모두 이러한 구성적인 지향성으로부터 발생하게 된다.

 

   요컨대 그가 말하는 구성이란 초월적인 사물의 실재 그 자체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존재sosein를 즉 지향적 대상으로서의 그 사물이 인식주관에 대해서 지닐 수 있는 <의미와 타당성>을 형성하는 것인바, 이점은 "인식하는 주관성"이 "모든 객관적인 의미형성과 존재타당의 근원장"이라고 주장되는 것에서도 분명하다. 이러한 주관성은 <초월론적> 주관성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위에서 말한대로 초월적인 사물들과 세계에 지향적으로 관계하여 그것들을 의미 통일체로서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당연히 다른 한편의 <초월> 개념에도 반영되어 이른바 초월적인 것도 여기서는 <지향적 - 이념적인 의식내재>라는 존재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후설은 그의 현상학을 "순수하게 내재적인 초월론적 철학"이라거나 "현상학적 관념론"이라고 자칭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이 관념론은 실재적인 세계의 현실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의 유일한 과제는 만인에게 있어 실재로서 타당한 이 세계의 존재의미를 해명하는 것인바, 이러한 <누구에게 있어서도 존재하는 객관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주관성을 그는 초월론적인 <상호주관성>이라고 부른다.

 

   (3) 수동적 지향성. 지향성의 본질이 구성적 수행에 있다 하더라도, 실재사물의 존재의미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그 소재가 되어야만 하는 감각소여가 필요하다. 능동적인 구성의 수행도 그것 자신은 비지향적인 감각소여를 대상으로부터 받아들여 그것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에서 시작된다. 즉 객관이 주관을 촉발함으로써 주관의 대상적 지향이 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설은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 취할 수밖에 없는 특수한 형태로서의 수동적 지향"의 기능에도 주목하여 수동성이 없으면 능동성도 기능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이와 같이 감각소여를 수용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과거의 의식생활에서 의미 획득된 것(=인식의 성과 등)을 미리 주어진 것으로서 수용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의미부여가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역시 수동적 지향성이 함께 기능하고 있는바, 이와같은 경우에는 <수동적 발생에 의한 구성>이라고도 말해지며 또한 <연합>이 그 원리라고 여겨진다. 덧붙이자면, 감각소여를 수용할 때에는 대상에 눈을 돌린다든지 손을 내밀어 만진느 등 주관 측의 능동적인 신체 운동이 필요해진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수용성>은 자아의 능동성의 가장 낮은 단계로 간주된다.

 

   (4) 지향적 종합과 내적 시간의식. 우리는 동시에 또는 연속적 내지는 단속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하나의 대상으로 종합하거나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여 그 각각을 의미통일체로서 인식한다. 이와 같은 지향적 종합도 지향성의 중요한 수행의 하나인바, 후설은 그 근본형식을 "동일화작용"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의 종합도 존재한다. 즉 우리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다양한 의식 체험 모두를 하나의 의식의 흐름으로 종합 통일하여 이러한 나의 의식류, 체험류로서 의식한다. 후설은 자아의 의식생활 전체를 통합하는 이러한 지향적 수행을 "보편적 종합"이라고 부르며 특히 중시하는데, 그 근본형식은 "모든 의식종합을 포섭하는 내적 시간의식"이라고 한다. 그는 더 나아가 사회와 문화와 같은 객관적 세계의 상호주관적 구성과 관련하여 "상호주관적 종합"의 기능도 고찰하며, 이와 같은 문제영역에서는 "상호주관적 지향성"이라는 술어도 사용한다. 어쨌든 이와 같이 모든 종류, 모든 단계의 종합과 구성이 모두 <시간화>인 이상, 각 자아의 의식생활에는 각각 고유한 역사성이 놓여 있는 바, 그 깊은 곳에는 과거의 체험들이 말하자면 침전된 의미의 역사로서 가로놓여 있다. 사람에 따라 동일한 사건에서 상이한 해석과 판단이 이루어지는 것도 그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각 판단에는 각각 의미의 생성이 있고 일종의 역사성이 감춰져 있기 때문에 각 판단의 의미를 역사를 물어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III. 그밖의 지향성 개념. 후설의 지향성론은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주로 사물이 지향적 대상으로 되는 경우에 대해 전개되고 있지만, 이 이외에도 또한 <표현의 의미지향과 직관에 의한 그 충족> 및 <시간을 구성하는 지향>에 대해서도 상세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후설에 의하면 표현의 본질은 의미지향에 있으며, 그 지향이 직관에 의해 충족되는 경우에 대상에 대한 관계가 현실화됨으로써 그 표현은 인식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둥근 사각형>이라는 표현에도 의미지향이 있기 때문에 무의미하지는 않지만, 그 지향은 직관에 의해 충족될 수 없는 까닭에 <반의미>적인 표현. 또한 <시간을 구성하는 지향>으로서는 과거파지와 미래예지, 종의 지향성과 횡의 지향성, 상기 지향과 예기 지향 등에 대해 고찰되고 있다. 다음으로 후설 이후의 지향성론 가운데 특히 주목 : 메를로-퐁티의 <신체의 운동성 지향>내지는 <신체적 지향성>. 분철 쪽에서는 행위의 의도를 주제적으로 고찰한 G. E. M. Anscombe과, 지향성 문제 속에서 언어철학과 심리철학의 융합점을 찾아 언어행위와 지각의 지향을 논고한 J. R. Searle의 intentionality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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