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주의적 태도
(1) 인격주의적 태도를 취한다면, 세계는 물리적 자연으로 이해될 수 없고, 인간의 삶이 거주하는 환경으로 이해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우리의 삶이 내거(內居)하는 환경으로서의 세계다. 우리는 세계 안에 있는 주체이고 그 안에서 인격으로서 환경과 관계한다. 가령 나는 나를 인격으로 이해하고, 그 나는 세계를 환경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태도에서 세계의 사물들은 물리적 자연물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강의실 안에 내가 있을 때, 그 강의실은 수업을 들을 수 있는 환경으로서의 강의실이다.
(2) 종교적 행위수단으로서의 대상인 절과 같이, 환경세계의 사물들은 인격체(주체)에게, 내 삶이 이루어지는 도구로서의 대상들이며, 그 도구성이 그 자체로(객관적으로)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 태도는 "자연적 태도"이다.
(3) 환경 세계 내에서 이해된 종교적 행위수단, 문학작품, 예술작품 등의 문화적 대상들은, 그 문화적 대상들과 관계맺고 있는 인격적 공동체를 이미 지시한다. 따라서 환경세계는 의사소통적일 수밖에 없다.
(4) 환경세계에서 인간 대 인간의 의사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 위에서 문화적 대상들이 인격적 '공동체'를 지시한다 한바, 인간은 다른 인간을 환경 세계 안에서 인격 대 인격으로 마주하며, 인격 대 인격은 '마주하는 주체'로서 대상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환경세계에서 인간은 다른 인간을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인격을 지닌 주체로 경험하고 이해한다. 인격 대 인격의 상호이해(공이해)에 근거해서, 이 환경은 '공동의 환경'이 된다. 여기에 근거해서 '사회성'이 가능해지며, 이 '사회성'이 의사소통적 환경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고, 이 세계는 정신세계를 가리키게 된다. 가령 유럽은 지리적 조건으로서의 유럽이 아니라 유럽인들이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열어낸 유럽이다.
(5) 인격은 환경세계와 어떤 식의 관계를 맺으며, 그 근거는 무엇인가?
ㄱ. 에펠탑은 세계 내 사물, 즉 문화적 대상이다. 인간은 문화적 대상을 이해의 방식으로 바라보며 그래서 환경세계는 열린 세계이다. 즉, 환경세계는 그 속에 있는 인격체가 개방한(열어낸) 세계이다.
ㄴ. 인격적 자아와 세계 내 사물 간의 관계나 인격적 자아와 환경세계와의 관계는 따라서, 세계 내 사물과 환경세계가 나에 대하여 있으므로 대자적이고, 인간과의 관련 공동체를 지시하며, 주체에 의해 의미구성된 것들이라는 측면에서, 하이데거의 '현존재' 구도를 예비한다.
a. 내 인격은 내가 속해 있는 환경 세계의 의미와 마주하고 있다(경험적 자아). 한편으로, 인간은 환경 세계의 의미를 열어낸 주체(선험적 자아)라는 측면에서 한 환경세계의 구조와 조건에 의해 결정되어버릴 수는 없다. 곧 주체는 환경세계에 전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나는 세계 안에 있지만, 그 세계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 조건을 인정할 수 있다. 실존철학은 이것을 강조한다.
b. 환경세계는 주체에 대하여 있으므로 '즉자적 세계'가 아니며, 나에 대하여, 나에 의해 의미구성된 내용을 지니고 정립된 세계이다.
c. 환경세계는 형식적 규정이 아닌 내용적 규정이다.
d. 주체와 환경세계와의 관계는 위에서 기술한바, 정태적 관계가 아닌 역사적 관계이다.
e. 인격적 자아와 세계 내 사물의 관계는 환경세계가 전개될 때 가능하다. 위 두 가지의 관계를 열어내는 장에 바로 환경세계가 있다. 그리고 그 방식은 객관적이며 공동주관적인 방식이다.
ㄷ. 환경세계 안에서 인격과 인격이 관계맺는 방식은 인과관계가 아닌 동기관계에 있다. 가령 외부적 원인에 의해 내가 강의실에 온 것이 아니고, 내가 설정한 환경세계 안에서 내가 가진 목적성 때문에 나는 강의실에 온 것이다. 이는 행동주의 비판 논리로 유용하다.
ㄹ. 이미 언급한바, 환경세계 내 주체는 의식작용을 자유롭게 수행하는 주체로서, 다른 인격이나 세계 내 사물에 관해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닌 동기관계를 가지고 관계맺고 있다. 그러한 주체가 환경세계에 관계맺음으로써 정신세계가 구성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