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주의, 역사주의, 심리학주의 비판
(1) 근대과학의 두 조류
: 낭만주의의 영향 위에서 자연주의와 역사주의 철학이 등장하게 된다.
ㄱ. 자연주의
: 자연주의는 정밀한 자연법칙에 따라 공간적 시간적 존재의 통일체라고 하는 의미의 자연에 대한 발견이 가져온 귀결로서 나타난 것이다. 근대과학은 자연을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시공간적 통일체로 설명하며, 기계론적, 인과적 설명방식을 채택한다. 근대의 자연관과 깊은 관련을 지니는 사조이다.
a. 물리주의(객관주의) : ex, 콩트는 학문의 발전은 실증성의 증대라고 생각한다. 콩트에 의하면 가장 실증성이 낮은 학문이 신화. 그다음이 형이상학. 가장 실증성이 높은 학문은 과학이다.
b. 심리학주의(자연주의의 한 변종)
- 형식논리학이 말하는 A=A 라는 것의 확실성을, 개별적인 마음 작용으로 바꾸는 것. 즉, 그것을 'A는 A라고 생각하면서 다르게 생각할 수 없다'는 마음작용으로 바꾸면 이는 심리학주의가 된다.
- 마음의 존재를 자연 속의 한 사물처럼 하나의 <사실>로 보고, 그것을 대상적으로 관찰하고 설명하는 것
- 심리학주의는 물리적존재와 심적인 존재의 영역적 차이를 간과하고, 마음의 존재를 자연적 사물과 같은 하나의 실재 및 사실로 환원하는 '자연주의'의 경향을 지닌다.
ㄴ. 역사주의
: 역사주의는 경험적인 정신의 삶이라는 사실영역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한다. 역사주의자는 모든 것을 역사적 사실로 환원해서 설명하려고 한다. (ex, 드로이센, 딜타이)
(2) 근대과학의 두 조류에 대한 후설의 비판
ㄱ. 자연주의
a. 당시의 조류가 과학이 가지고 있던 방법론을 너무 강조해서 자연으로 바꾸어서 설명할 수 없는 의식과 이념조차 그렇게 바꾸려고 시도했다고 후설은 비판한다.
a=1. 의식의 자연화 : 인간 의식을 연구하는 학문이 심리학인데, 경험심리학은 인간의식을 경험적 조건, 사실로 바꾼다. 그렇게 해야만 관찰, 실험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구조 안에는 경험과 사실로 바꿀 수 없는 지평이 있다는 것이 후설의 주장이다. 의식과 대상 사이의 지향적 관계는 그 자체로 관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과학자들은 의식의 본질을 자연적 대상을 다루는 것처럼 환원해서 설명할 것이다. 이는 심적인 것 그 자체의 고유한 지평과 개념을 결여시킬 것이라고 후설은 우려한다.
a-2. 이념의 자연화 : 본질-의미가 어디로부터 올까, 를 설명할 때, 로크/버클리/흄은 관념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했다. 이때 관념은 경험의 대상이며, 그 철학자들은 이념적인 것이 경험적인 것에 근거해서 성립한다고 말하는 셈이 된다. 후설이 보기에 이는 이념적인 것을 자연적/사실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b. 실험심리학의 한계
- 실험심리학은, 자연화될 수 없는 의식의 구조를 설명할 수 없다(놓치고 있다). 후설에 따라 의식을 지향적 의식이라고 볼 때, 지향적 의식은 항상 ~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에 ~에 대한 의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상과 의식 사이에 발생하는 구조를 통해서 설명해야 한다. 이 구조를 실험심리학은 해명할 수 없다. 후설식으로 말하면 실험심리학은 '순수한 본질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이하는 07항목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 철학은 순수 논리학, 형식적 존재론, 내용 존재론으로서 본질을 다룬다. 철학은 의식의 경험적 조건이 아니라 의식의 본질구조를 다룬다. 심리학의 본질을 다루면 그 심리학은 순수 심리학, 현상학적 심리학, 형상적 심리학이 된다. 후설에 의하면 경험심리학(실험심리학)은 의식의 본질구조를 다루는 현상학적 심리학에 그 토대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실험심리학, 현상학적 심리학은 궁극적으로 선험적, 초월론적 현상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ㄴ. 역사주의
(유인물 3.3) 역사주의의 다른 모습이 세계관이며,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시대적 상황,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르다. 세계관은 결국 역사적 사실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된다. 후설에 의하면 철학은 세계관일 수 없다.
(유인물 3.4) 세계관 철학도 문제가 있는데, 상대주의에 봉착할 수 밖에 없고 나아가서 참된 지식은 성립할 수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cf. 전현상학기 후설의 심리학에 대한 비판에서도 상대주의 비판이 사용된다 : 후설은 의식내용은 심적 표상도 심리적 사실도 아니라고 한다. '그건 교탁이야'라는 말은 심적 표상과는 다른 것이다. '교탁'이란 말은 비슷한 다양한 심적 표상에 적용되며 그들 심적 표상을 규정하고 있다. 다양한 심적 표상을 규정하는 규정성은 심적 표상일 수 없다. 심적 표상은 개인마다 다른 주관적인 개별적인 것인데 이런 표상으로 지식의 근거를 말한다면 상대주의에 봉착하게 된다.]
(3) 현상학은 자연주의, 역사주의의 방법과 어떤 차이를 가지는가? [거칠게 발췌]
a. 후설에 의하면 본질학문은 경험학문으로 환원될 수 없고 반대로 경험적인 것이 본질로 소급되어야 한다. 따라서 본질학문의 중요한 역할이 경험학문을 성립시키는 토대학문이 되는 일이다. 후설은 경험학문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본질학문이 있어야 되고 또 한 번 더 경험적인 것이든 본질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그것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대상과 의식 작용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학문으로서 선험적 현상학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 선험적 현상학의 궁극적 지평에는 선험적 자아가 자리하고 있다. 이 선험적 자아의 영역은 인간 존재를 해명하는 데 있어서 경험적 조건을 떠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선험적 조건이 인간 쪽에 있다는 것을 지시한다. 만약 인간에게 경험적 조건밖에 없다고 한다면 인간을 연구하는 모든 학문은 경험학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후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b. 다시 말해, 모든 학문은 선험적 현상학으로 소급되어야 한다. 과학자들은 어떤 대상을 연구할 것이다. 하지만 대상이 가지고 있는 대상성만 찾아내려고 하지 대상을 연구하는 자기자신과 대상 사이의 관계는 묻지 않을 것이다. 곧 의식과 의식주체 사이의 관계는 묻지 않을 것이다. 선험적 현상학은 경험학문이든 본질학문이든 학문의 궁극적 가능근거를 설명해가려 하며, 그러다보면 존재의 성립조건을 설명해내어야 하고, 그러면 존재론이지 않으면 안된다. 자연주의와 역사주의는 이 방법을 결여한다.
c. 사태라고 하는 것은 상황 속에 있는 사태이기 때문에 거기로부터 빼거나 떼어낼 수 없다는 것이 현상학 계열에 서 있는 철학자들의 발상이다. 그럼 인간을 설명할 때 현상학 계열에 서 있는 사람들은 후설이 말하는 것처럼 생활 세계 안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든지, 현존재와 존재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든지, 실존과 상황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든지, 몸과 세계를 통해서 설명하든지, 어찌되었든 관계를 통해서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과학이 말하는 것은 사태가 아니고, 한 개체를 이 사태 안에서 빼 가지고 설명하려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한다면 생물학자들은 사태 속에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 사태 속에 있는 인간을 별도로 빼 내어가지고 관찰, 실험해서 공통된 객관적인 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며 심리학 역시 과학이란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의식작용이라고 불리어질 수 있는 마음 사태를 관계 속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독립시켜 떼내고 인간을 관찰해서 나온 것을 설명하는 학문이다. 반면, 후설은 관계의 설명에 중점을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