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중지
(1) 판단중지란?
ㄱ. 판단중지는 세계로 향한 우리의 시선을 우리 자신/주관/자아에로 향하게 한다. 판단중지는, 세계의 존재를 세계의 '현상'으로, 나아가 세계에 관계하는 의식의 활동영역(의식현상)으로 전환한다. 가령 책상에 관한 지각은 판단중지 이후에도 여전히 책상에 대한 지각으로 남아 있으며, 구체적인 나의 의식활동은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ㄴ. 후설은 판단중지를 통해 드러난 의식현상의 본질을 다름아닌 의식의 지향성에서 찾고 있으며, 지향적 의식에 대한 지향적 분석을 수행하고자 한다.
ㄷ. 현상학적 환원을 하기 위한 방법 역시 판단중지이다. [현상학적 환원에 관해서는 07 목차에서 다룰 것이다.]
a. 경험학문은 사실에 대한 판단을 하는 반면 철학자들은 사실을 다루지 않는다. 경험학문이 탐구하는 영역을 판단중지하고 괄호치기한 후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으면 모든 것은 사실로 되어 있을 것이므로 철학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후설은 그런 후에도 남는 것이 있다고 본다.
b. 감각에 의해 보여진 것(가령 분필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내가 그것을 분필이라고 이해할 때, 내가 이해하고 있는 내용 즉 개념은 객관적인 것으로서 남게 되며, 그것이 사실을 괄호치기 했을 때 드러나는 '본질'이다. 따라서 '본질'은 있다. 이처럼 사실의 영역에서 본질의 영역으로 가기 위해 후설이 사용했던 환원이 바로 '형상적 환원'이다. 이는 소급해가는 것으로서 원래 있던 것이 괄호치기를 통해서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드러난 것이지, 발명한 것이 아니다.
ㄹ. 후설은 진정한 학문 이념인 명증성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 판단중지를 수행하고, <의식의 현상> 즉 '나는 사유한다'는 자기명증성의 지평에 이른다.
(2) 왜 판단중지를 해야 하는가?
i.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는 경험적인 것으로 바꾸어 설명할 수 없다. 거꾸로, 의미를 구성하는 마음작용이 있으면, 의미는 마음작용으로 소급시켜서 설명할 수 있지만, 이 마음작용을 의미로 소급시켜서 설명할 수는 없다. 거꾸로 마음작용을 사실적인 것으로 소급시켜서 설명할 수도 없다. 마음을 설명하는 다양한 논리가 있을 수 있지만, 후설이 보기에 우리의 마음의 조건은 기존의 인식론적 구도나 형이상학적 구도로는 설명될 수 없다. 후설의 의도는 기존의 인식론자도 형이상학자도 보지 못했던 의식의 한 지평을 설명하는 것이며 이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 판단중지이다. 판단중지를 통해 우리는 '선험적 영역에 이르는 길'을 밟게 된다.
ii. "자연적 태도에 빠져 있으면 자연적 태도는 뭐만 올인한다 했습니까 ? 대상만 드러난다 했지요. 후설은 '그 대상만 있는가 ?'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대상과 관계되는 부분들을 판단중지 해보자는 것입니다. 만약 원래 대상밖에 없었으면 대상적인 것을 괄호치면 모든 것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괄호쳐도, 판단중지해도 남는 게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져 있는 세계는 여전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주어져 있는 세계 역시 판단중지 해보자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경험적인 거든지 의미적인 거든지 상관없이, 경험과 의미와 관계된 마음작용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보고 어떤 때는 듣는다고 말한다면 나의 태도에 의해서 달라지는 그 마음의 작용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3) 판단중지와 데카르트
a. 대상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방법은, 참이 아닌 것으로 처리되어 증명의 문제가 생긴다.
b. 세계가 판단중지된다고 해서 그 세계가 현상학의 이념을 수행하는 우리에 대해 부정된다는 것은 아니다.
c.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통한 '부정의 방법'과 달리, 판단중지에 의해서는 그 세계에 대한 우리의 판단, 선택, 결단 등이 유보될 뿐이다.
d. 세계도 존재하며,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감각적 경험도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판단중지된 것은 그런 세계와 경험에 대한 우리의 판단, 추리, 사고 등일 뿐이다.
e. 의식초월적인 것에 대한 철저한 판단중지, 판단의 배제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중지를 수행하는 그 자아에로 되돌아간다. (#. how are they different?)